회생 가능성 '제로'라는데…연명치료만 하는 '좀비 벤처' 판친다 [긱스]

입력 2024-03-27 17:53   수정 2024-04-04 16:13

경영난으로 지난해 임직원을 모두 정리해고한 스타트업 대표 A씨. 더 이상 사업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파산 절차를 알아봤다. 하지만 투자사 8곳 중 한 곳에서 파산을 강력하게 반대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였다. 당장 매달 수천만원의 이자를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A씨는 피가 마른다.

4년 전 스타트업을 창업한 30대 B씨는 끝까지 회사를 살려보려고 버티다가 빚이 늘어나 개인 파산했다. 5년간 신용불량자가 되는 바람에 스타트업 업계에서 사실상 내쳐졌다. 재창업 도전은커녕 ‘실패자’란 꼬리표가 붙어 사회활동도 어려운 처지다.
○파산조차 못 하는 스타트업들

27일 업계에 따르면 투자 혹한기에 경영난을 겪는 스타트업이 급증하면서 폐업과 파산을 둘러싼 갈등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더 이상 사업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돼 파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일부 투자사가 반대하는 경우다. 투자 실적이 중요한 운용사(GP)인 벤처캐피털(VC)들이 출자자(LP) 눈치를 보느라 쉽게 파산에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업 능력 없이 회사 이름만 유지하는 ‘좀비 벤처’가 대거 양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스타트업은 투자사 7곳의 파산 동의를 모두 받고도 투자사 한 곳의 동의를 얻지 못해 파산 절차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망할 때 망하더라도 파산 동의는 해줄 수 없다는 투자사 때문에 회사는 물론 나머지 투자사들 모두 답답해하는 상황”이라며 “파산 동의를 하면 포트폴리오 하나가 날아가고 고스란히 확정 손실로 잡히기 때문에 LP 눈치를 보면서 판단을 미루는 것”이라고 했다. 동의 없이 파산하면 형사 고소하겠다며 스타트업에 엄포를 놓는 투자사도 있다.

창업자가 투자자에게 알리지 않고 폐업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회사를 몰래 판 뒤 잠적하는 사례도 있다. 적기에 폐업을 선택하지 못하고 끝까지 버틴 창업자가 개인 빚을 잔뜩 지고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한다. 로펌업계 최초로 VC를 설립한 최철민 최앤리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는 “예전엔 스타트업 청산은 있어도 파산은 거의 없었는데 최근 1년 새 어려워진 스타트업의 파산이 눈에 띄게 늘었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M&A도 꽁꽁…퇴로가 없다
벤처 혹한기에 스타트업들은 몸값을 대폭 낮춰 투자 유치를 도모하거나 다른 기업에 회사를 파는 형식으로 출구전략을 짠다. 문제는 한국 벤처시장 특성상 둘 다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한 VC 심사역은 “자금이 수혈되면 다시 살아날 기업이 꽤 있는데 후속 투자를 받는 게 녹록지 않다”며 “직전 투자보다 기업가치를 낮추면 기존 투자자 중 한두 곳이 꼭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몸값을 깎아 신주를 발행하면 기존 투자자 입장에선 특별한 이익 없이 지분이 희석된다.

스타트업 인수합병(M&A) 시장도 얼어붙었다. 차세대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조원 이상 비상장사)으로 꼽히던 한 스타트업은 중견기업과 매각 논의를 하다가 결국 어그러졌다. 논의 과정에서 수천억원에 달하던 기업가치를 크게 깎았지만, 인수 기업 측에서 더 낮은 값을 요구했다. 지난해 스타트업 M&A는 53건으로 전년(126건) 대비 57.9% 급감했다. 온라인 클래스 기업인 클래스101이 경영난을 겪는 스튜디오바이블을 인수하는 등 일부 불황형 M&A가 있었지만 소수 사례다. 카카오 등 빅테크가 ‘문어발’이라는 비판에 사실상 M&A를 멈추면서 작은 스타트업의 퇴로가 사라졌다.

스타트업 전문 법무법인 미션의 김성훈 대표변호사는 “투자도 못 받고 팔지도 못하면 결국 재기불능 상태로 가는 것”이라며 “지금이 사업을 정리할 때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도 결론을 못 내 피해 규모를 키우고 법적인 리스크까지 안게 되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재창업 합의 모델 필요”
스타트업은 창업 초기 수억원의 정책자금을 통해 덩치를 키워온 경우가 많다. 사업 전환이나 재창업 기회 없이 무너지면 결국 국가 차원의 기회비용이 커지는 셈이다. ‘아름다운 퇴장’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 실리콘밸리나 싱가포르는 투자사들이 보유 지분만큼 의사결정 권한을 갖고 폐업 등 주요 결정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는 시스템이 정착돼 있다. 모든 투자사가 투자계약서를 쓸 때 폐업 동의권 조항을 넣는 한국과는 문화가 다르다. 최 변호사는 “미국은 재창업과 재투자 사이클이 짧은데 한국은 이보다 훨씬 보수적”이라며 “회사 대표자가 성실하게 경영했다면 모든 투자자의 동의를 받지 않더라도 파산 페널티를 크게 물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창업자가 새로운 사업으로 재도전할 때 투자사들이 기존 권리 행사를 유예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재창업 모델이 자리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 변호사는 “신용보증기금 등 정책금융기관에서 스타트업에 특화된 워크아웃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정은 스타트업얼라이언스 이사는 “한국은 스타트업들이 경영난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필요하다면 상황을 오픈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해외에선 스타트업 청산을 돕는 서비스가 주목받고 있다. 미국의 선셋, 심플클로저, 카르타 등은 어려워진 기업이 자산을 처분하는 일을 돕고 빠르게 폐업 절차를 밟을 수 있도록 지원한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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